학생이라면 꼭 챙겨야 할 건 검정고무신과 보자기, 그리고 양은 도시락이다.
양은이 본격적으로 사용된 건 1960년대부터다. 가볍고 잘 끓는 양은은 ‘빨리빨리’ 코리아의 역동성과 맞아떨어졌다.
글 박준영 기자
자료 부천교육박물관
허기와 참기름이 없었다면
안에 든 건 별것 없었다. 맨밥에 김치다. 그나마도 쌀밥이 아닐 때가 많다. 눈치 없이 달걀 프라이가 밥 위로 올라가 있으면 ‘녀석’들의 타깃이 되니 달걀은 언제나 밥 아래 ‘있거나’ 아니면 높은 확률로 ‘없거나’였다.
콩자반에 멸치 볶음 정도면 괜찮은 조합이었다. 비엔나소시지는 희귀했고, 분홍 소시지는 그래도 ‘있는 집’ 자식 티를 내줬다. 지금 보면 열악해도 없어도 너무 없던 시절, 그 와중에 성장기를 맞아 끝 모르고 삐져 나오는 허기와 참기름 몇 방울, 난로의 뜨거움이 이 모든 걸 먹을 만하게 만들었다.
지긋지긋한 양은 도시락
한겨울, 새벽부터 몇 리 길에 시달려 냉골이 된 도시락은 오전 내내 조개탄 난로 위가 제자리다. 켜켜이 쌓인 노랗고, 누렇고, 누리끼리한 도시락은 되돌아보면 장관이었다. 목장갑을 낀 주번이 못 미더울 땐 제자들의 따수운 식사를 위해 선생님이 나서야 한다. “뒤집어라.”
힘센 놈 도시락은 늘 맨 먼저 아래 칸을 차지하고, 재수 없으면 점심때까지도 데워지지 않아 차가운 걸 먹어야 할 때면 김을 뿜는 노란 주전자를 찾아야 했다.
금세 구수한 밥 탄내로 가득해진 교실, 아직 2교신데 배꼽시계는 벌써 정오를 넘었다. 어느 순간 코끼리표 보온 도시락에 자리를 내주며, 사라진 것 같았던 지긋지긋한 양은 도시락은 이제 ‘추억의’라는 수식어를 붙이지 않고선 맛볼 수 없는 아련한 게 됐다.